타이거 JK는 많은 한국 래퍼들과 정반대 자리에서 힙합을 향해 걸어갔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래퍼들은 미디어를 통해 제한된 방식으로 힙합을 접하는 괴리감에 처했다. 그래서 이 이질적 문화를 한국에 어떻게 뿌리내리게 할지 고민하거나, 그 괴리를 극복하고 더욱더 미국 힙합을 닮은 음악을 만들기를 갈망했다. 반면 JK는 미국에서 힙합과 함께 자란 후 한국에 돌아왔다. 그 앞에 놓인 장벽은 한국 문화를 모르는 교포 래퍼라는 경계선이었으며 더욱더 한국인다운 힙합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뽕짝 음악을 샘플링한 비트, 갈수록 걸걸해진 플로우, 가사에 등장한 '김치', '한국인의 피와 눈물' 같은 단어, 도가도 비상도 같은 노자 철학의 개념은 한국인 되기의 흔적이었으며 'call me tiger'에 등장한 단어 '태권도'의 연장선에 있다.
백인과 흑인 사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 경계를 맴돌던 그는 '토종 래퍼'와 '교포 래퍼'의 경계에 처했다. 또한 대중가요와 장르 음악의 경계가 있었고, 상업 가요계와 언더 힙합 신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했다. JK는 “힙합은 사는 방법” “너도 힙합, 나도 힙합”처럼 힙합의 정의를 추상화해서 그 외연을 거의 지우듯이 넓히는 말을 자주 뱉었다. 어쩌면 늘 경계 바깥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어진 선을 지우고 타인들과 함께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을 갖고 싶은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런 족적을 통해 JK는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어오던 사회적 과도기에 한 문화의 파이오니어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전 세계가 스마트 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지금은 90년대의 힙합처럼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문화적 양식이 뒤늦게 수입될 수가 없다. 외래문화는 네트워크를 타고 퍼져 나갈 따름이지, 한 인물이 문익점처럼 문화를 전래하며 대표성을 얻는 일도 생기기 힘들다. 오히려 지금 한국 힙합 신에선 문화적 경계에 대한 자각 없이 미국 힙합의 동향이 곧장 재생산되거나 아주 일상적인 레벨에서 힙합이 재현되고 있다. 타이거 JK는 어떤 의미에선 해외 교류가 제한적이던 시대의 수혜를 누리며 한국 힙합의 파이오니어가 된 인물이다.
JK보다 앞서서, JK와는 다른 위치에서 한국 힙합이 출범하는 데 공헌한 사람도 많기 때문에 파이오니어는 사실 과장된 평판이다. 하지만 숱한 한국 래퍼 1세대 중 그가 파이오니어,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게 된 건 그 오랜 시간 동안 기권하지 않은 채 장렬한 존재감으로 힙합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나를 호랑이라고 부르라며 라임을 뱉던 소년은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힙합처럼 말하고 힙합처럼 인사하고 힙합처럼 행동하는” 현역 래퍼로 서 있다. 한국 힙합은 미국 힙합 신에 비해 역사가 짧고 아직도 애들 듣는 음악 취급을 받곤 한다. JK가 한국의 스눕독, 제이지, 나스가 되어 준다면 존재 자체로 신의 역사에 무게감을 더 해주고 래퍼들의 활동 정년 경계를 넓혀 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짝패가 떠난 후 홀로 서기를 하고, 척수염에 걸려 병마가 덮치고, 소속사에서 일어난 사연 많은 일로 오랜 공백 기간을 가졌어도, 술 취한 호랑이는 "죽지 않는 영혼"으로 부활했다. 힙합이 더 이상 가난과 철학이 아닌 부와 성공을 표상하는 시대가 왔다. 가요계에 몸 담은 이래 만년까지 불우한 일들을 겪은 그에게도 더 많은 풍요와 안정이 따라오기를 바란다. 그 역시 후배들에게 래퍼란 직업으로 오래도록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전망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리라.
자기계발의 화석이 된 한국 힙합 (0) | 2021.09.13 |
---|---|
일리네어 레코즈 '11:11' : 한국힙합 장르사의 연결고리 (0) | 2021.09.09 |
타이거 JK, 힙합이란 나라에서 온 이방인 - 2 (0) | 2021.09.02 |
타이거 JK, 힙합이란 나라에서 온 이방인 -1 (0) | 2021.09.02 |
댓글 영역